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박정희 정부/평가/긍정적 평가 (문단 편집) === [[경제 개발 5개년 계획]] === 1959년에 완성된 경제개발 3개년 계획을 포함하여 1950년대에는 여러가지 정부 주도의 경제부흥계획이 수립되었지만, 그것은 거의 실행되지 못했다.1953년 3월에 발표되었던 국제연합한국부흥단(UNKRA)의 ‘한국경제재건계획(네이산보고서)’이 있었으나, 단지 원조정책의 일환으로 작성된 건의보고서로서 공식적으로 채택되지는 않았으며, 1959년 3월 부흥부 산하에 있던 산업개발위원회에서 작성된 경제개발 3개년계획안(1960∼1962)이 대한민국 정부 주도의 경제개발계획의 시초이나 4.19 혁명으로 실행할 기간을 찾지 못했다. 그 뒤 장면 내각의 제2공화국에서는 이 계획안을 토대로 산억 부흥부산하의 경제개발 5개년계획 시안을 작성하였으나, 잘 알려져있다시피, 5.16 군사정변에 의해 정권이 교체되면서 실행에 옮길 시간을 갖지 못했다. 이에 따라 경제개발계획은 본격적으로 박정희 정부 하에서부터 본격적으로 수립·시행되었고, 1961년 박정희 군부는 약간의 수정작업을 거친 뒤 이승만 정부와 장면 내각의 계획안과 노선을 대부분 이어받아 이후 20여년간 4차에 걸친 5개년 계획 시리즈의 첫 번째 시작인 제 1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을 발표한다. 박정희 정부는 이처럼 집권 초 이승만 정부와 장면 내각의 계획안과 노선을 대부분 이어받아, 수입대체산업화에 입각한 내수 위주의 경제정책을 추진하였고, 제1차 계획의 목표 성장률 7.1%를 내세웠다. 하지만 당시 대한민국의 현실에, 추가적인 막대한 내자와 외자의 조달이 없다면 당시 계획되었던 시멘트, 철강, 정유, 전력 등 관련 인프라 사업들은 불가능한 것이였고, 박정희 정부는 내부자본 동원을 위해 일반은행을 국유화하고 1962년 6월에는 통화개혁을 단행했지만, 실패로 끝나고만다. 게다가 에너지원을 포함한 사회간접자본과 기간산업을 건설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외국자본이 요구되었으나 이 기간에 도입된 외자는 필요 외자에 비해 턱없이 부족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박정희 정부는 기존의 원안을 대폭 수정하예 1964년 2월 보완계획안을 발표하였다. 이 계획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목표 성장률을 7.1%에서 5%로 하향 조정하였으며, 내수 위주의 수입대체산업화에 입각한 대규모 인프라 사업의 규모가 줄어들거나 폐기되었다.이후 1965년부터 수출주도공업화 전략으로 기본적인 노선을 확정지은 후 박정희 정부는 본격적인 고도성장의 시작을 보여주었다. 제 1차 경제개발계획(1962∼1966년)의 목표는 모든 사회적·경제적인 악순환을 시정하고 자립경제의 달성을 위한 사회적간접자본의 기반을 구축하는 데 있었다. 이 기간의 연평균성장률이 7.8%로서 계획을 5%이던 목표치 초과하였고, 월남전 파병, 한일 협정등 굵직한 사건이 이루어진 시기이며, 1964년 공산품 수출의 진흥으로 수출이 1억달러를 돌파하자, 그해 11월 30일 수출의 날로 기념하고, 1965년부터 수출제일주의를 표방하며 수출주도화 전략으로 치우치게 되었다. 이 시기의 경제성장률은 7.8%로 목표를 상회하였으며, 1인당국민총생산(GNP)는 $83에서 $126로 증가되었다. 제 2차 경제개발계획에서(1967∼1971년)는 그 동안의 경험과 정비된 통계자료를 이용, 계량모형화하였고, 국내의 경제여건과 시장기구 등을 다각적으로 반영한 장기전망을 토대로 하였다는 점에서 계획기술상으로 제1차 경제개발계획보다 훨씬 우수하였다. 이 기간의 기본 목표는, 식량자급화와 산림 녹화 개발전략은 수출제일주의와 이에 따른 수입대체의 복선 정책으로 집약되며, 새롭게 주목할점으로는 ‘산업구조의 근대화’가 강조되면서 이 시기부터 본격적으로 중화학투자가 시작되며 중화학공업화가 추진되었다. 수출의 급성장과 더불어 연평균 경제성장률은 9.7%로서 계획을 초과 달성하며, 제조업은 수출의 획기적인 증가로 연평균 21.5%의 성장률을 기록하였다. 이와 같은 높은 성장률은 우리 나라 경제를 도약의 발판 위에 올려놓았다. 이 시기 시작된 정책으로는 [[경부고속도로]] 개통, [[새마을운동]]등이 대표적이다. 제 3차 경제개발계획(1972~1976) 시기부터는 본격적으로 정부 차원의 대규모의 중화학공업화 드라이브가 이루어졌으며, [[현대중공업]] 등 대규모 중화학공업 인프라가 세워진 것도 이 시기이다. 대한민국은 1차 산업 및 경공업 공산품 위주의 산업 구조에서, 중공업 위주의 산업국가로서 빠르게 공업입국하였으며, 제3차 경제개발계획이 끝나는 1970년대 후반으로 접어들자 우리 나라 경제는 차차 후진국의 굴레를 벗어나 신흥공업국으로서 거듭났다. 이 기간에는 미국의 베트남 철수와 [[닉슨 독트린]]에 의한 안보 질서의 혼란, 1973년 석유파동으로 인한 유가 급등으로 온 세계 경제의 위기속에서도, 수출수입의 급증, 수출 드라이브 정책, 중동 건설 등으로 위기를 극복하여 목표치를 초과한 연평균 9.7%의 성장률을 기록하며, 이시기 최초로 외신에서 한강의 기적이라는 표현이 나오게 되었다. 제 4차 경제개발계획(1977~1981)에서는 성장·형평, 능률의 이념하에 자력성장 구조를 확립하고 사회개발을 통하여 형평을 증진시키며, 기술을 혁신하고 능률을 향상시킬 것을 목표로 하였다. 1977~1979년 이 시기에도 꾸준하게 국가차원의 중화학투자는 이루어져 연평균 10%를 초과하는 고도경제 성장이 지속되어 전체 제조업에서 중화학공업의 비중은 절반을 차지하게되었다. 계속되는 중화학공업 건설로 1977년 100억 달러 수출 달성, 1인당 국민총생산(GNP) 1000달러가 되었지만, 1978년부터 물가고와 부동산 투기, 중화과투자에 따른 생활필수품 부족, 각종 생산애로 등의 누적된 문제점이 나타났다. 70년대의 고도성장을 뒷받침한 중화학 중복투자의 부작용이 나타나 부실기업 정리 및 재고처리를 단행하던 시점에 엎친데 덮친겹으로 2차 석유파동까지 일어나 유가가 폭등하였고, 1979년 10.26일에는 박정희가 김재규에 의해 피살되었다. 다음해인 1980년 1954년 이래 최초의 마이너스 성장과 (-1.7%) 기록하여 침체기에 들어서나 했지만, 이후 12,12 쿠데타로 집권한 전두환 정부에서 뒤 이어 중복투자를 정리하며 물가를 안정시켰고, 국외에서도 석유파동이 예상보다 빠르게 잠잠해졌다. 이후 유가가 안정되고 저유가 시대가 다가오자, 한국 경제는 그 동안 쌓아올린 중화학공업의 기반위에서 다시 한번 빠르게 성장하였고, 이후 한국 경제는 단군 이래 최대의 호황을 맞게 된다. 박정희 정부하에서 수립되고 시행된 1차에서 4차까지 4번의 5년 단위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서 상정한 목표는 항시 초과 달성되었고, 1인당 국민소득은 기하급수적으로 상승하며, 고도성장을 이루어내었다. 이후 경제가 복잡해지고 60-70년대와는 비교가 불가능할 정도로 민간과 시장이 성장하면서 이러한 국가 차원의 대규모 관치경제 개발은 불가능해졌지만, 박정희 정부하의 추진된 4차에 걸친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은 2차 대전 이후 저개발국에서 수립되고 추진된 수 많은 정부 주도의 경제 계획 중에서도 몇 안되는 가장 성공 사례로서 손꼽히고있다.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경제 개발 5개년 계획)]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